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문단 편집) === 추축국의 대미 선전포고 === 일본과 동맹 관계이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러한 선전포고가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삽질]]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무기 지원, 경제 원조 등을 넘는 수준의 대대적인 참전은 나치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빵을 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치욕의 날 연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진주만 공습 직후 추축국 전체가 아닌 오로지 [[일본]] 단 한 나라에게만 선전 포고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주만 공습이 있는 상황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이 늦어졌으리라는 분석이 있다.[* 사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랜드리스 등으로 1차 대전 초기 때처럼 무기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럽 전선과 동아시아 모두 미국 본토와 한참을 떨어져 있던 데다가, 미국인 대부분이 '설마 감히 미국을 공격하겠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하루 뒤, 독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도 독일을 따라서 연달아 선전포고를 했고 이와 별개로 둘의 동맹국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의 [[헝가리 왕국]] 역시 [[1941년]] [[12월 15일]]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과정도 아주 졸속이 따로 없었는데, 당시 총리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L%C3%A1szl%C3%B3_B%C3%A1rdossy|바르도시 라슬로]](Bárdossy László)가 의회 및 [[호르티 미클로시|섭정]]과 최소한의 협의도 거치지 않고 냅다 전쟁을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이후 전쟁선포가 아니라고 번복했다가 다시 전쟁을 선포한 게 맞다고 말을 바꾸는 등 혼란스러운 입장 표명을 하였다. 미국과 헝가리가 직접 전선에서 맞붙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아무튼 미국은 이를 잊지 않고 [[살러시 페렌츠]]나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처럼 공산당을 피해 자국 측에 항복한 헝가리 [[전쟁범죄]]자들을 전부 본국 공산정권에게 송환해 버렸다. 바르도시 역시 스위스에서 추방된 이후 미군에 체포되어 항복했다가 이렇게 공산정권에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진주만 공습 이후에도 여전히 대일전이 아닌 대독전 개전에 회의적이었으리라는 오해와 달리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 직전과 직후에 각각 집계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90~91%가 대독전 개전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오직 7% 정도만 이를 반대했다.[* [[https://cafeptthumb-phinf.pstatic.net/MjAxOTAzMjNfMTg0/MDAxNTUzMzQ4MzY2NDQ4.Qh19aWbmzVfZ3uDQaQS_qKfW4fCAPTocboxj8UXeq2Ig.hdAuaArtmEVQmtyGrMkFER1hHSaikXjLaltxsYyazdcg.JPEG.moonjosh4/K-077.jpg?type=w800|참고자료 1]], [[https://exhibitions.ushmm.org/americans-and-the-holocaust/us-public-opinion-world-war-II-1939-1941|참고자료 2]].] 또한 12월 7일 이전에도 미국은 [[영국]]에 전쟁 물자를 암암리에 지원했고, 미국 국적의 상선들이 [[독일]]의 공격을 받고 미국 군함이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는 등 미국과 독일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루스벨트는 본래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대독전 수행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먼로주의 이후 고립주의 관성에 젖은 미국인들의 반전 여론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물자 지원을 제외하면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그 국민 여론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루스벨트에게는 대독전 수행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의 선전포고가 없었더라도 루스벨트에게 차라리 의회 설득이 어려우면 더 어려웠지 대국민 설득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다. 다만 독일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면 의회 설득을 비롯한 여러가지 절차 때문에 1942년에 바로 독일전선에 개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는 '''환호작약하며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일본 제국|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 물론 수도가 함락당한 기준으로 보면 외세의 공격이 받은 적이 없다지만 일본이 쳐들어갔다 깨진 사례는 많았다. 우리나라 관련으로만 봐도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와 왜의 전쟁을 시작으로 [[백강 전투]], [[성덕왕]] 시절 침입, 조선시대 당시 [[임진왜란]] 등이 있으며, 또한 세계사만 놓고 봐도 당장 진주만 공습 2년 전인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에 패한 바 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서양에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수많은 구대륙 국가와 달리 본토가 점령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일본이 개항되며 서양과의 교류가 활성화된 이후 일제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 굵직굵직한 전쟁들에서는 연승한지라 이러한 인식이 생겼다. 한편 [[윈스턴 처칠]]은 동일한 소식을 듣고서도 '''"3천년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이라고 낙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단, 처칠은 미국이 혹시나 대일전 수행에 집중하고 유럽 전선을 소홀히하지 않을까 우려해 미국으로 가서 루즈벨트로부터 유럽 전선이 선결 과제라는 확약을 받는다. 이를 'Europe First', 혹은 'Germany First'라 부른다. 실제 미 행정부는 전쟁 내내 유럽전선에 훨씬 더 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으며, 대일전선 장성들은 정부가 너무 대독전선에만 힘을 쏟는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ㅡ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아래는 존 톨랜드의 책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나오는 내용이다. > 전시 본부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오토 디트리히였다. 그는 12월 7일 오후 늦게 히틀러의 벙커를 찾아 매우 중요한 전갈이 있다고 알렸다. 히틀러는 방금 러시아 전선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받고 우울했는데, 디트리히가 더욱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을까 걱정했다. 디트리히 공보처장이 급하게 메시지를 읽자 그의 표정은 정말로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는 밝아졌다. 그러고는 매우 흥분해서 "이 보고가 정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디트리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확인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보고서를 낚아채더니 코트와 모자도 두르지 않고 군사 벙커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카이텔과 요들 장군은 히틀러가 상기된 얼굴로 전문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카이텔에게는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이 히틀러의 악몽을 떨쳐내준 것처럼 보였다. 지도자는 헤벨과 함께 목소리에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는 전쟁을 질 수 없다'''고 외쳤다. '''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 >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336 위에 적힌 것만 보면 히틀러가 이때다 싶어서 자발적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독일에 대해 대미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일본의 입장에선 미국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독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독일도 [[독소전쟁]]의 역전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일본이 독일에 '''"독일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일본도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일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일본의 달콤한 제안만 믿고 덜컥 대미선전포고를 질렀다가 뒤로는 일본의 통수를 맞고, 앞으로는 미군의 공세를 맞이하며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다. 상세는 후술된 문단을 참고. 히틀러의 반응과 별개로 일선에서 소련군과 영국군을 맞아 싸우고 있던 상당수의 독일 육/공군 상급장교들이나 하급 장교들을 비롯한 일반 사병들은 공식 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정황이 없었고, 그만큼 구체적인 반응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41년 12월 당시 최대 공방전이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진행 중이었고, 그 외에도 독일군의 빈약한 동계전투 준비로 소련군의 전 전선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독일은 일본이 소련 뒤를 쳐서 극동 소련 정예군을 붙들어주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소련은 이 겨울 동안 긴급수송으로 극동 정예군을 투입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만큼 당시 동부전선은 급박하게 전투가 전개 중이었기 때문에 상급 장교들은 일본이 동쪽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신경 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 해군은 이전부터 미국과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찬성하는 편이었는데, 이미 대서양에서 미국과 독일 해군 간의 대립이 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미국의 선박이라도 봐주지 말고 닥치고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 [[카를 되니츠]]를 오히려 히틀러가 반대할 정도였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일본이 극동의 영국군을 공격해 [[영국 해군]]의 시선을 [[인도양]]으로 끌어주어 고전을 하고 있던 독일 해군의 상황을 개선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은 극동 영국 해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미국의 반격으로 인해 태평양 방면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양 방면의 극동 영국 해군은 살아남았으며, 미국이 일본 해군을 상대하는 동안 영국은 안심하고 이미 [[노르웨이]]에서 상당수의 구축함을 잃어버리고 독일 해군의 자존심 비스마르크까지 침몰당해 껍데기만 남아 있던 지중해의 크릭스마리네+이탈리아 해군을 심해 끝까지 털었다. 그리고 그 덕에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북아프리카 군단은 연료 및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더하여 선전포고 이후 미국은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질 때마다 꼬박꼬박 [[U보트]]를 사냥하러 해군을 지원했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Deutsche-Amerikanische petroleum ([[https://de.wikipedia.org/wiki/Deutsch-Amerikanische_Petroleum_Gesellschaft|DAPG]]) 등 독일의 기술에 미국의 자본이 결합한, 미국 회사의 독일 자회사들이 당시 독일에 많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독일의 전쟁수행에 크게 도움을 주던 중이었다. 즉 공습 이전까지 이들 미국계 독일 회사를 이용,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미국 기업들의 계획이 진주만 공격으로 틀어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전쟁수행까지 방해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